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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의 장점 (7)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UNCOMMON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신학

by Nomad seeking Freedom 2024. 1. 1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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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원주의의 장점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들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열려 있어야 하는가? 이런 가운데 우리 마음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결국에는 우리의 중심까지 상실할 위험이 있지 않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다. 현대의 다원주의는 우리가 우려할 만한 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가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다원주의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다. 이 용어는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이들에 의해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다원주의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다원주의는 '많은-주의'(many-ism)다. 그 다양성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우리가 어떤 유의 '많음'(many-ness)을 지목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경우에는, 다원주의가 그저 대처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경축해야 할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다양성

 어느 신학자 모임에서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하나님이 무한한 상상력을 지닌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비치는 것에만 창조사역을 한정하셨다고 추정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 논점은 충분히 숙고할 만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 보이는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만으로도 이미 풍부한 상상력을 입증하셨다.

 

 하나님은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다양성을 좋아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도 다양성 그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다. 우리가 다원주의 문화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원성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건데 많음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많음 자체가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많음을 긍정할 때 분별력을 지녀야 한다. 어떤 다원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다원주의적 의식

 이 세상에는 언제나 많은 '무리'가 존재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많음에 대처하는 일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다원주의에는 새로운 면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다원주의가 새로운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소위 선택의 문화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선택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양적인 용어로만 그 동안의 변화를 묘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선택은 하나의 생활 방식이 되었다. 일견 무한한 선택의 바다에 빠져 있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이 다원주의적 의식 상태다. 그리고 이처럼 다수의 대안을 인식하는 것이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과 관련해서는 선택의 여지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깊은 확신에 따라 삶을 영위할 자유를 누린다면, 그것은 사실상 다원주의적 의식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다.

 

다원주의와 우상 숭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두 가지 형태의 다원주의를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게다.

 첫째 형태는 흔히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는 이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주변에 있는 즐비한 세계관들과 가치 체계들 앞에서 당황한다. 사실 난감해질 만도 하다.

 

 당신의 그림이 성경의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정확한 그림이다. 만일 다른 어떤 것 혹은 어떤 존재를 중심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다. 그렇다고 우상 숭배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정치적 수단을 동원하여 우상 숭배적 다원주의를 말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 신념에 따라 살 권리가 보장되는 완전히 민주적인 사회야말로 기독교의 복음 전도와 가르침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장이다.

 

문화적 다양성

 사람들이 "우리 다원주의 사회" 운운할 때는 또 다른 종류의 '무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는 세계관과 가치 체계의 다원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문화적 관점이라고 부르는 것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재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views)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다양한 조망들(viewings)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문화적 '장소'에 서 있다. 우리의 안목은 인종, 종족, 지역, 언어, 경제적 지위, 성 등과 같은 요인에 의해 형성 된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실재를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진리와 선의 문제로 평가하면 안된다. 

 

 물론 어떤 것이든 우상이 될 소지가 있다. 인종, 성, 경제적 지위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느 것도 '본래' 우상인 것은 없다.

 어떤 신학자들은 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인류 전체가 집합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지구사의 풍부한 문화적 다양성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홀로 반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죄로 얼룩진 세상에서 문화적 다원주의는 다른 종류의 다원주의와 거의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다양성은 하나님 보시기를 무척 귀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얽힌 것을 풀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의 계시에 비추어 문화적 차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는 데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다른 문화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문화적 다양성을 파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다양성을 마주 대할 때 이에 못지않은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정신을 함양하는 것은 시민교양 면에서 우리가 성장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이는 또한 천국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준비 과정이기도 하다.

 

 

Comment_ 제6장에서는 앞에 5장에서 말한 감정 이입의 구체적인 요인으로써 다원주의에 대해 설명하며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다원주의가 꼭 나쁜 것이 아니라고 다원주의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에서 말하고 그렇다고 해서 꼭 다원주의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다원주의를 통해 배워야할 기독교적 시민교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무례한 기독교'는 다원주의 또한 하나님의 다양성과 연결시켜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공존하고 무리를 지어서 활동하는 사회집단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은 다원주의가 하나님을 향해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무리가 아니라면 그것은 우상 숭배하는 집단 밖에는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해야만 한다.

 내가 이번 6장을 읽으면서 마음에 걸렸던 것은 바로 위에 밑줄 친 부분-다양성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준비 과정이라는-이다. 이것은 너무 확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천국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인데 마치 그것을 준비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부풀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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