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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말하기 | 교양을 갖춘 언어 생활의 중요성 (5)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UNCOMMON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신학

by Nomad seeking Freedom 2024. 1. 1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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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말하기

교양을 갖춘 언어 생활의 중요성

 

귀담아 들으시는 하나님

 교양 있는 사람은 언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우리는 자기가 하는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품위 있는 자리'에 거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귀담아 듣고 계시며, 어떤 언사는 하나님께 너무나 거슬리므로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바른 언어 습관 기르기

 자칫 그릇된 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말을 별로 안 하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말에 대해 염려하며 줄곧 불안에 휩싸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하지만 바른 언어 습관을 기르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 주변에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우리와 판이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분노의 수사학

 1970년대 중반 야세르 아라파트(Yasir Arafat)가 유엔을 방문했을 때 유에 총회에서는 아주 격렬한 분노의 발언이 오갔다. 그 언어들이 어찌나 해로운지 그 피해가 과연 회복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고 논평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말하는 내용이 이런 것 같은데" 혹은 "지금 내가 이런 위협을 느끼고 있는데" 라는 식의 발언이 국제적인 토론에서 공식적 언어로 채택된다면, 속 깊은 불만이 제대로 표출되어 서로 심각하게 소원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치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델 공동체가 되어,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타인에게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와 다른 경우가 많다. 유엔에서 오가는 비난의 수사학이 그리스도인들 간에 일어나는 논쟁의 어조와 그리 다르지 않다. 17세기에 청교도와 퀘이커교도 간에 일어난 거센 논쟁이 하나의 본보기다. 위대한 청교도 설교자였던 리처드 박스터(Richard Baxter)는 한 팸플릿에서 퀘이커 교도를 "술주정뱅이, 욕쟁이, 호색가, 음탕한 자들" 및 여타 "비참한 피조물들"과 도매금으로 취급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아직도 충분히 모욕하지 못했다는 듯이, 그는 퀘이커 교도가 "교황 절대주의자" 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보통 심한 욕이 아니다. 특히 애석한 것은 흔히 이런 식의 분노에 찬 발언이 진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곤 한다는 점이다.

 오해의 소지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법만 잘 배우면 모든 문제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순지한 낙관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신념을 중요시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직면하는 심각한 이견을 그저 낭만적으로 무마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말을 더 잘 이해하고 나면 그들의 관점이 애초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십자군

 그럼에도 일부 그리스도인은 정직한 이해에 대한 요청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종종 십자군식 의식 구조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십자군은 자기들의 대의명분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정적인 십자군 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신학적, 도덕적 논쟁을 할 때 어떤 수단이든 허용된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그들은 논적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하지 않고, 전술을 택할 때는 어떤 수단도 마다히지 않는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겨라. 그것이 바로 십자군적 정신 자세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군이 아주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도록 설득할 필요가 있다. 즉 대의 명분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리스도인에게 유일한 대의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렇다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급하게 행동하면서 진리를 놓쳐 버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우리가 다른 이들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의도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때 과연 그분이 영화롭게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응시

 무례한 태도를 교정하려면 좀 더 정직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나는 교양이 말보다 더 깊은 차원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것은 우리가 실재를 보는 방식에 뿌리박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사물을 보시는 방식에 따라 -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존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 모든 것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재에 대한 올바른 관점, 곧 하나님의 응식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기독교적 제자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 '코람 데오'(Coram Deo) - 살고 있다는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수동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Gustavo Gutierrez)의 표현을 좋아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영성을 위한 "쓸모 없는", "낭비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즉 모든 다른 의제에 관여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그런 순간 말이다.

 

하나님이 보시듯이 보는 것

 하지만 이런 기독교적 수동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는 좀 더 능동적인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응시를 강렬하게 의식하는 경건의 시간에는 하나님의 관점에 따라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 능동적으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가 말하는 방식을, 보고 듣고 걷고 만지는 방식과 연결시킨다. 이것은 거꾸로 그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그분의 임재, 곧 '품위 있는 자리'를 의식한다는 의미다.

 

 

Comment_ 제3장을 보고 예상했던 것처럼 기독교적 시민교양의 행동양식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졌다. 말하는 습관에 대해서 말하면서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 라고 이겨라'라는 십자군의 무대포식 말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결국에 생각이 드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대로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친히 사랑에 대해 알려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랑을 생각한 것이고 '무례한 기독교'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써 언어 생활을 유의해야 한다고 콕 집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 잠언에서 지혜있는 자와 미련한 자를 대조하듯이 지혜있는 자의 행동처럼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하는 것 보다 다른 이의 말을 많이 들어주고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말만 지혜롭게 하는 습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때로는 나도 말실수를 많이 한다. 집에서도 그렇고 친구들을 만날 때에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인데 괜한 허풍만 잔뜩 불어 넣는 것 같다. 그리고 후회하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이라면 쉽게 맹세하지 말아야 하는데, 내 것이 아닌 내 이름과 내 목숨과 온갖 것들을 다 걸고 맹세하기도 했었다. 결국 그렇게 했던 맹세들은 지키지 못하고 맹세를 들었던 이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다. 나만 받으면 될 것을 교회 다니는 이들이 다 그런 것처럼 몰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하나님께 죄송하고 회개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5장에서는 4장처럼 실질적인 부분들을 다룰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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