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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종교의 도전 (9)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UNCOMMON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신학

by Nomad seeking Freedom 2024. 1. 1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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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다른 종교의 도전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저 멀리 외국 선교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했다. 오늘날에는 외국 선교지가 바로 저 길 건너에 있다! 우리는 저녁 산책길에 무슬림과 힌두교인, 불교도와 정령 숭배자와 마주칠 수 있다. 

 

한 종교를 '안다는' 것

 이처럼 다양한 종교적 관점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는가? 그것들은 우리가 유리하게 활용할 만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는가?

 다이애나 에크(Diana Eck)교수가 '세계의 종교' 과목을 시작하며 "당신이 한 종교만 알고 있다면 ... 아무 종교도 모르는 셈이다"라는 말을 했다. 많은 종교를 공부한 후에야 한 종교를 '알' 수 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다. 내면에서부터 기독교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자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다. 나는 불교나 정령 신앙 등의 과목을 수강하는 것이 어떻게 이처럼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는데' 보탬이 될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당신이 한 종교만 안다면 ... 아무 종교도 모르는 셈이다"라는 말은 "당신이 한 부모만 있다면 ... 아무 부모도 모르는 셈이다" 라는 말만큼이나 헛갈리는 발언이다.

 

 우리가 소위 '자녀 양육의 비교 연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할 말이 있다. 자녀 양육 연구들은 종종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자녀 관계를 더 건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갓 부모가 된 사람들은 여러 다양한 가정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기초해서 만든 자녀 양육 지침을 읽음으로써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녀 양육의 비교 연구'는 때로 우리가 자신의 부모-자녀 관계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한 종교만 알면 ... 아무 종교도 모르는 셈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단순하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그러나 타종교에 노출이 되면 나 자신의 믿음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양극화된 접근

 일부 그리스도인의 노골적인 믿음의 확신에 크게 비중을 두는 전도 전략을 펴자고 주장한다.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제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초청하자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교양 있는 태도에 크게 의존한다. 이것은 다른 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과 정중한 대화를 하여 상호 이해와 협조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독특성을 배격하는 종교 간 대화는 수용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나 전도론자의 진영에 흡족해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비그리스도인과의 정중한 대화에 열려 있는 전도 지향적 기독교를 기대한다. 진실한 자세로 다른 사람들과의 진지한 토론에 참여 하면서도 기독교의 진리 주장을 확고하게 붙들 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극화를 초월하는 길

 만일 내가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의 분명한 부르심을 무시한다면, 내 복음주의적 신념에 불충실한 자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대인의 말을 경청할 필요도 있다고 강하게 느낀다. 유대 민족은 내게 유대교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기독교 공동체의 가르침과 활동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상호 보완의 가치

 나는 복음 전도와 대화 중 어느 하나를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두 가지 모두에 가치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대화는 복음 전도를 위한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으며, '관계 중심적인 전도'를 주창하는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해 온 것이다. 대화는 중요한 쟁점을 놓고 상호 이해와 협조를 도모하는데 그 직접적인 목적이 있다. 이런 노력은 전도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 간의 대화는 적절한 정보를 얻고 민감성을 키우는 데 종종 도움이 된다.

 

종교에 관한 올바른 대화

 대화하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그 대화가 이끄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갈 의향 - 심지어 내 근본 신념을 바꾸게 될지라도 - 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것들은 괴팍한 질문이 아니며, 오히려 중요한 우려 사항을 표출하는 의문들이다. 먼저 내가 시인해야 할 점이 있다. 즉 무슬림과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 사역을 믿는 내 믿음을 기꺼이 제쳐 놓아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런 대화에 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몇 가지 신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리의 직접적인 근원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근원에서 오는 진리 주장을 시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예수님은 유일한 진리(The Truth)이시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종교 전통에 속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내가 타종교인과 대화할 때,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내 믿음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 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대화에 임할 때 그리스도의 '숨은' 권위와 능력의 범위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는 열린 자세로 나아갈 수 있다.

 

의문을 품는 것

 자주 인용되는 성 어거스틴의 기도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심오한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즉 우리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추구 본능을 특징짓는 영적 불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충족될 수 있다. 종교 간의 대화는 인간의 불안정한 상태가 다른 종교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Comment_ 제8장에서는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를 알 때에 진정으로 기독교를 알 수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참으로 할 말이 많다. '무례한 기독교'는 앞에서 계속 성경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성경을 인용하는 부분도 극히 일부분만을 인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지금 8장에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녀 양육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보고 배우는 것은 맞는 말이다. 종교를 부모에 비교한 것인데, 만약 부모대신에 하나님을 넣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호와의 이름이 망령되이 불려진 것이고 이것은 신성모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부분들을 교묘히 빠져나가면서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다른 종교 권위자들의 말을 듣고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도 이해된다. 시민교양을 가지고 감정 이입을 통해 저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도 알겠다. 하지만 기독교를 알기 위해 다른 종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내 신앙이 용납하지 못하는 부분이 크다.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 다른 종교를 알아야 한다고는 하신 적이 없다. 우리의 삶은 어떤 방법(시민 교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입각해야 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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