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열린 마음 | 교양 있는 태도의 중요성 (6)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UNCOMMON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신학

by Nomad seeking Freedom 2024. 1. 14. 01:18

본문

 

5. 열린 마음

교양 있는 태도의 중요성

 교양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교양 있는' 사람이 되기도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로 상당한 노력을 해야 가능한 것이다. 이장에서는 우리와 매우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법을 자세히 살펴볼까 한다.

 

감정이입

 시민교양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타인간의 심리적 간격을 좁힐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애초에 우리와 아주 판이하다고 느꼈던 사람들과 일종의 공감대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은 감정 이입의 훈련이다.

 '감정 이입' 이란 문자적으로 '감정 속으로'라는 뜻인데, 나 자신을 타인의 감정 속으로 투영시킴으로써 상대방이 겪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모든 동료 시민 각각에 대해 일대일 차원의 감정 이입을 개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몇 가지 공통점을 중심으로 일반 시민에 대한 감정 이입의 감수성을 개발하는 것은 가능하다.

 내가 여기서 감정 이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공감적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곧 좀 더 인간적인 존재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것은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길이기도 한데, 성육신이란 결국 궁극적인 감정 이입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감정 이입은 성품 개발에 유익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가치는 아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불신자들과 진정한 친구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 간에 건강한 기반이 조성되고, 그것을 기초로 그들에게 우리 구원자의 인격과 사역을 소개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호기심

 감정 이입 훈련은 상당한 호기심에 의해 진전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판이한 사람들의 경험에 친숙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인간됨의 길이와 넓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단순한 동기에서 나온다.

 호기심은 우리 삶에서 여러 좋은 것들을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그리스도인은 강한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곳은 하나님의 세상이고, 우리는 세상을 더 잘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와 아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시민교양을 배우는 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것에 대한 건강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중요한 방편이다.

배우고자 하는 정신

 시민교양은 또한 배우고자 하는 정신(teachability)으로 타인에게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면에서는, 감정 이입과 호기심에 대해 다룰 때 이미 배우고자 하는 정신이 언급된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감정 이입의 자세를 취하고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곧 그들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들에 관해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니체는 무신론자의 대변자였고 그의 철학적 견해는 허무주의에 맞닿아 있었다. 그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그저 계시 종교를 그럴듯하게 퇴출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를 부인할 때 어떻게 의미와 목적의식을 잃어버리게 되는지를 보여 주려 한 것이다. 나는 니체의 생애와 사상을 공부하면서 그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있다. 내가 니체에게 배운 것이 있는가? 자기의 조상인 루터파의 신념을 그토록 격렬하게 내던졌던 그 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함으로써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나는 니체의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얻은 유익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성공적으로 가르쳐 준 어떤 구체적인 사상을 들라고 하면 곤란해진다.

 

 내가 방금 제시한 본보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함 사항이 있다.

 첫째, 나는 니체에게 배운 구체적인 교훈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해서 당황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관점에서 반드시 일말의 진리를 배워야 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나 내가 만약 니체에게 무어인가를 배웠다 해도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떳떳이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드 불신자와의 만남은 내가 진리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종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신자들에게 교훈을 주시는 분이다. 예언자 발람은 자기 당나귀의 입에서 나온 말로 잘못을 지적받았다. 주님은 때때로 이상한 교사들을 보내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그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에 열려 있어야 한다. 

 

불신자에게 배우기

 우리는 아주 근본적인 사안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유의 '진리'를 배울 수 있다. 

 내가 니체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는 아주 일관성 있는 무신론자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그래서 자기가 배척한 성경적 세계관에서 아무것도 빌려 올 생각이 없다. 그의 철학과 성경의 관점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대조는 매우 교훈적이다. 니체가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준 도움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쟁점을 명약관화한 용어로 규정지었다는 점이다.

 

 비그리스도인은 때로 우리가 성경적 관점에서 보며 간과한 것을 보도록 도울 수 있다. 예를 들면, 나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나는 공산주의 이념이 대부분 오도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의 곤궁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음을 칼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이 밝히 보여 준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그 교훈을 배우고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학정의 희생자를 위해 노력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새롭게 듣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경로에 어떤 인위적인 한계를 그을 수 없다. 비록 우리의 의견이 그들과 근본적으로 전혀 다를지라도, 우리가 진리를 더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그들이 도울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열려 있는 자세를 의미한다.

 

경계가 모호해진다?

 어쩌면 독자들도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에 대해 "그저 모든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호한지 잔뜩 설명하면 되거든." 이라는 인상을 받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 점을 이미 말한 바 있으며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즉 쟁점들은 종종 복잡하고 모호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반대자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열린 자세로 경청해야 한다. 타인의 관점을 성급하게 배격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사안을 너무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들어 경계가 모호해질 위험이 있지 않은가? 감정 이입이니 자기 점검이니 하는 것은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사치스런 화두가 아닌가? 물론 모호성과 복잡성을 주장하는 것이 마땅히 직면해야 할 도덕적 투쟁을 회피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바로잡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린 자세를 수반한다면 이것은 성화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동일한 지점으로 줄 곧 되돌아오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강하게 체험하지 않는 다면 감정 이입과 호기심, 배우고자 하는 정신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 대해 열린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Comment_ 제5장에서는 4장을 읽고 내가 생각했던 부분이 나왔다. 바로 경청하는 자세인데, '무례한 기독교'는 경청의 자세를 뛰어 넘어 호기심을 가지고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해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감정이입'을 하여서 그들에게도 배울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새로운 충격이었다. 불신자에게 배운다는 것은 여태껏 내가 살아오는 25년 동안에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불신자 말고 이단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성경을 나보다 더 많이 잘 알고 그것을 꽤고 있다는 사실 이었는데, 불신자에게서 배운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신앙 외적인 부분에서는 배울 것이 있겠다 싶었는데 신앙 적인 부분에서 우리가 성경에서 놓치는 부분을 그들이 찾아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래서 책은 많이 봐야 할 일이다. 아마 이 충격은 베드로가 사도행전 10장에서 받은 충격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본 베드로처럼 나는 불신자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깨닫는 것은 저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며 저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분명 숨겨져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6장에서 5장에서 말한 감정 이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