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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있는 시민 교양 | 신실한 믿음과 공손함은 양립할 수 있는가? (2)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UNCOMMON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신학

by Nomad seeking Freedom 2024. 1. 1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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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념 있는 시민 교양

신실한 믿음과 공손함은 양립할 수 있는가?

  

 "제기랄,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아!"

  1921년에 예이츠(W.B.Yeats)가 쓴 "재림"(The Second Coming)이란 시에 그녀가 묘사한 그 이미지-"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고 있다"-는 예이츠가 사회적 위기감을 표현하며 사용한 것이다.

 도시와 시골 모두에서 폭력이 증가 일로에 있다. 유명한 성직자가 추종자들게게 이제 불신앙의 세력에 대항해 "싸울" 때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나는 친절함과 온유함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친절하고 온유한 삶을 살도록 창조되었고 사실 친절과 온유함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열거하는 '성령의 열매'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친절과 온유함의 표준에 부합하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백성이 아닌 셈이다.

 

시민교양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좀 더 예의바른 사람이 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계발 할 에의는 진리에 대한 소신을 품은 예의다. 마틴 마티(Martin Marty)가 말한 것처럼, 오늘날의 문제 중 하나는 예의바른 사람은 종종 강한 신념이 없고,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예의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교양 있는 태도에다가 우리 신념에 대한 "강렬한 정열"을 결합할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도전은 신념 있는 시민교양 (convicted civility)을 계발하는 일이다.

 

"내적인" 교양

 시민교양은 곧 공정인 예의다. 외적인 공손함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양 있는 태도에는 '내적인' 측면도 있다. 

 

인간다움을 꽃피우는 삶

 나는 예의바른 태도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삶에 근접하는 길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겠지만 이에 동의했을 법하다. 그는 인간이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시민교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동물' 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도시의 시민으로서 역할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면 결코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좋은 시민이 되려면 편하고 친숙한 연줄에만 기초한 인간관계를 넘어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도토리는 그 가지가 자라고 잎이 피기까지는 타고난 잠재력이 실현되지 않는다. 사람도 공적인 영역에서 처신하는 법을 배우기까지는 그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다. 존 칼빈은 공적인 삶이 우리에게 "시민적 정의와 부합되게끔 우리의 교양을 정립할"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 그리고 칼빈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관련하여 심오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시민교양을 향한 몸부림

 그런데 어떻게 진정 친절하고 온유한 정신을 견지하는 동시에 우리의 강한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 이 양자를 모두 유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이에 대한 대답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념을 수반한 교양은 힘써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도 신념을 수반한 예의를 견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인정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 ... 을 좇으라"고 말하는 동시에 "거룩함 ... 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한다.(히12:14)

 북미 역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시민교양을 좇아가는 기나긴 추구의 역사였다. 회중주의자는 침례교를 관용하는 것이 어려웠고, 로마 가톨릭교인은 장로교인과 성공회 교도와 싸웠다. 그런데 그 이후 신흥 종교가 출현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몰몬교도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했다. 셰이커교도(Shakers)를 비롯한 일부 집단은 색다른 유의 공동체 생활을 도입했다. 여호와의 증인은 병든 아이가 수혈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Christian Scientists)는 아예 의술을 통한 치료 자체를 거부했다.

 전통적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은 도전에 대처하는 법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20-30년 동안 등장한 새로운 도전들은 우리를 처음의 백지 상태로 되돌아가게 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이슬람 모스크가 있고, 뉴에이지 신봉자들이 학교와 사업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일부 교수들은 마법과 같은 고대 이방인의 관행으로 되돌아가자고 공공연하게 외치고 있다. 동성애 커플은 교회가 자기들의 '결혼'을 축복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 케이블 텔레비전은 포르노를 우리 안방까지 송신한다. 이런 유의 사태를 볼 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예의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고 싶지 않다. 성경 저자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고 권면하던 그 시대의 사회는 오늘날에 못지않게 다문화적이고 다원적인 사회였다. 그리고 당시의 지배적인 문화는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서 공존 공연의 태도를 지향하지 않았다.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복음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두 가지 전략

 확고한 신념과 시민 정신을 두루 갖춘 사람을 많이 배출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교양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돕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교양을 갖추도록 돕는 것이다.

 전자를 위해서는 일종의 복음 전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제자의 삶이 참으로 매력적인 생활 방식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는 또한 우리가 두 번째 전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시민교양을 쌓게 되면 믿음이 약해질 것이라고 우려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고 확신한다.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계발할 때 우리는 오히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Comment_ 제1장 "신념 있는 시민교양" 의 내용을 보면서 외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것처럼 구제함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있는 곳만 하는 외식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온유함과 친절함이 마음속에서부터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안타깝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건데 그리스도인들 안에 '나는 죄인이다'라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그런 나약한 부분에 있어서도 "나는 죄인이니까 그럴 수 있어."라고 자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고 죄인이기에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버렸다면 그 안이 텅 비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야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만 사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진리인 복음이 신념으로 잡히게 되는  것이고 자연스레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밟는 시민교양을 넘어선 신념에 의한 시민교양, 즉 그리스도의 향기로서의 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음 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시민교양에 대해 배울 텐데, 계속 생각이 드는 것은 교양이라는 말 자체가 나에게 비춰지는 뜻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교양있는 척하지마"라고 누군가 내 귀에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 여기서 말하는 교양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은 교양, 진정 우리의 사회를 빛 가운데로 나오게 하는 시민교양에 대한 얘기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시민 교양을 어떻게 개발할지 다음 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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