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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시민교양의 변호 (4)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UNCOMMON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신학

by Nomad seeking Freedom 2024. 1. 12.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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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독교적 시민교양의 변호

 

  대다수의 기독교 집단에서 영웅시되는 인물 중에는 적어도 십자군이 몇 명은 끼여 있게 마련이다. 나는 최근에 그런 인물에 관한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 종교개혁기 끝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시대에 칼빈주의 전통에 속한 한 사람이 자기 나라 국민이 모두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기를 원했다. 그 문제에 관한 한 그는 어떤 타협도 거부하고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무기까지 집어들었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타협에 응하거나 순교자의 죽음에 처하거나 양자택일을 하도록 요구 받았다. 그는 순교의 길을 택했다.

 나는 그 사람이 관용을 베풀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확신한다.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을 관용하는 것이 언어도단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민교양을 변호하기 위해 찾을 수 있는 최상의 성경적 입장에 귀기울이고자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어떤 것을 제시 할 수 있을까?

 

공적인 기독교

 하나님은 공적인 의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복음은 개개인을 위한 좋은 소식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를 위한 좋은 소식이기도 하다. 아니 온 창조 세계를 위한 좋은 소식이다. 아이작 왓츠(Issac Watts)는 유명한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복음의 능력은 "저주가 있는 저 먼 곳에까지"(far as the curse is found)미치도록 되어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저주의 상태를 좋아하시지 않는다. 정부가 타락하고 사람들이 기만과 신성모독이 거짓을 일삼을 때 그분은 슬퍼하신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의 대리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공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설명할 때 기독교 집단마다 각기 다른 점을 강조한다.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은 아이들이 건강한 가정에서 자라고 공립 학교에서 십계명에 바탕을 둔 도덕을 함양하는 질서정연한 사회를 지향한다. '급진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화해와 정의 실현으로 부르심을 강조한다.

 

 우리의 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은 표준을 공적인 삶에 적용하고자 애써야 한다. 성경의 메시지는 무척 풍부하고 복합적인데, 원래 고대 근동 문화를 대상으로 선포된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삶에 올바로 적용하려면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 간의 뜨거운 논쟁은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만 띠자 않는다면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가는 데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해결책을 찾다가 절망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 하고, 우리 양심에 비추어 보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한다면 어떤 전략과 프로그램에 대해 상당한 확신을 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

 하나님은 공적인 의에 대해 온유한 관심과 존중하는 자세를 갖고 계신다.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좀 더 가혹한 면을 주로 강조한다. 즉 통치권, 거룩함, 권능, 분노 등과 같은 성품 말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치자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은 종의 모습으로 자기 백성에게 오시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통치자이심을 분명히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분노의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그분은 또한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분이다(시 86:15).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대리자로서 신의 성품을 본받도록 부름받았다. 우리가 공적인 삶에서 제자도를 발휘하려면 하나님의 친절한 온유함을 닮은 성품을 계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친절과 온유함을 반영하도록 부름받았다는 말이다.

 

 공적인 의를 이루려는 우리의 노력은 신중해야 한다. 이는 무척 위험 부담이 따르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신중함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공적인 문제에 대해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다. 앞에서 언급한 그 칼빈주의 순교자의 발언은 무례한 것이다. 관용은 언어도단이라고 그는 말했다. 어떤 타협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샬롬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만들기 이전의 시대에 살고 있다. 행동을 하되 현 시대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는 그 궁극적인 승리의 징조 내지는 '첫 열매' 라는 것을 알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이 관용과 타협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와는 다른 신념과 생활 방식을 관용하는 정도에 대해서는 일정한 도덕적 한계를 그어야겠지만, 그런 한계에 너무 조급하게 도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조심스런 태도를 정립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공식을 내가 만들었는데, 그것은 우리 각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에서 신실한 태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하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완성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나라의 권능과 현존을 증거하는 것이다.

 교회는 우리가 공적인 의를 배우는 일차적인 장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더 '의로운'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의로운'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는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우리의 메시자가 신뢰를 얻는 것은 우리가 외인들에게 좀 더 우리처럼 되라고 초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신양 성경 전체를 관통해서 흐르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시민교양의 범위

 어떤 그리스도인도 성경이 '교양'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친절과 온유함을 계발하도록 격려하는 여러 본문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교양의 범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를테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가 돌보아야 할 대상은 가난한 그리스도인에 국한된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온유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대해 줄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은 정당한 질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되리라." 그런데 누구를 향한 사랑인가? 우리가 기독교적 교양을 지켜야 할 한계는 어디인가?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아주 특별한 국가 공동체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이와 똑같은 소명이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국내 정책' 에 속하는 이슈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것은 '대외 정책'의 문제가 되는 셈이다. 이 대회 정책에 관해서는 성경이 몇 가지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다.

 

 낯선 자에 대한 대우. 이스라엘 백성은 낯선 자들에게 애써 존경을 표하라는 명령을 자주 받았다. 낯선 자들은 마땅히 친절하고 사려 깊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레위기19장은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천명한다. 낯선 자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 그들을 본토인처럼 대우하라. 그들을 너희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 핵심을 놓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은 그들이 그런 입장에 처했던 과거를 상기시키셨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34절)

 여기에 인종적, 종족적, 종교적 적대감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진 현대 세례를 위한 중요한 교훈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타인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도시의 평안.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시민교양과 관련하여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였다. 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헌신한 백성이라는 면에서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온통 이방 문화에 둘러싸여 전혀 낯선 환경에 처한 나그네 신세가 되었다. 시편 137편은 그들의 가슴에 사무치는 애절함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4절) 그들의 의문에 대해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응답하셨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나라"(7절) 이것은 시민교양으로의 부르심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연민의 마음. 예수님은 소위 군중에게도 사랑의 관심을 보이셨다. 내가 좋아하는 예는 마태복음 9장 끝에 나오는 감동적인 대목이다. 이 장에서 예수님은 이미 여러 개인에게 상당한 관심을 표시했다. 중풍병자를 고치셨고, 멸시 받던 세리를 자기 제자로 부르셨고, 눈먼 사람 둘을 고치셨고, 귀신 들린 자를 해방시키셨다. 그 모든 것이 끝난 다음 엄청난 무리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셨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그분은 군중을 향해 목자 같은 연민을 보이심으로 개인적인 구원자 이상의 존재임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목자의 역할을 담당해서 우리 사회에서 혼란에 빠진 '양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목자의 온유한 보살핌이 필요한 양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과 "모든 사람." 신약의 서신들은 로마 제국 곳곳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 신자들이 품고 있던 의문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구약의 유대인들의 의문과 비슷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이 현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우리와 공통 분모가 거의 없는 사람들, 아니 때때로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는 자들에 대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사도의 위치에 있었던 선생들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여겼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사람'과 '만인'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 거듭해서 가르침을 주었다. 이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을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그리고 바울의 동료였던 디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불신자와 맺는 관계는 베드로의 편지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한 군데에서 아주 간단하고 단도직입적인 지침을 주었다. "모든 사람을 공경하라"(벧전 2:17).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스럽지 못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선한 목자이신 구분은 마음대로 제 길을 가는 자기 양을 인내심을 품고 열심히 찾으셨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신적인 온유함과 경외심의 대상이 되는 영광을 누린 셈이다. 우리 자신이 이런 온유함을 맛본 이상 시민교양에 어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Comment_ 제3장 기독교적 시민 교양의 변호를 보면서 제2장에서 생각해 봤었던, "왜 저자(역자)는 시민교양을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로가 말하면서 마치 시민교양과 구분되어지는 것처럼 좀 더 고귀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라고 의문을 가진 점이 조금 풀리기는 했다. 어떤 부분에서 인하게 된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있었다.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시민 교양의 표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3장에서 언급함으로써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생기게 된 것 같다. 의문점이 조금은 풀렸다는 말이다.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하나님의 본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명확하게 제시가 되어졌고,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과 어떠한 생각을 갖는 것이 기독교적 시민교양인지가 분명하게 들어났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가 어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을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시민교양에 대해서 관심을 갖을 수 없는지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기독교적 시민교양에 관심을 갖고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하고 있다.

 3장에서 아쉬웠던 것은 좀 진부한 논리 전개로 앞부분부터 미리 예수 그리스도로 변호를 끝마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들어나서 좀 아쉬웠던 것을 빼고는 다 좋았던 것 같다. 이제 4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시민교양에 어떻게 관심을 갖아야 하는 지와 행동방법들이 언급 될 것으로 예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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