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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시민교양에 대한 오해 (3)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UNCOMMON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신학

by Nomad seeking Freedom 2024. 1. 1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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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적 시민교양에 대한 오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좀 더 교양 있는 태도를 배우라고 격려할 때가 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도 걱정스럽다. 그래서 나는 시민교양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내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미리 확실히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자기 학교에서 한 학생이 다른 학생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평가는 바로 '판단하는 자세'(judgmental)를 갖고 있다는 지적이라고 얘기했다. " 이제 더 이상 강의식에서 건전한 논쟁을 할 수 없답니다. 어떤 중요한 논제에 대해 누군가가 자기 입장을 표명하면, 다른 이가 그 사람을 판단하는 자세를 갖고 있다고 말하니까요. 그걸로 끝입니다. 토론 종결인 셈이죠. 모두가 위협감을 느끼고 있답니다!"

 시민교양에 대한 요청은 이런 전염병을 퍼뜨리는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한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단연코 시민교양을 반대할 것이다. 기독교적 시민교양은 상대주의적 관점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믿음과 가치관이 동등한 것처럼 대우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기독교 신앙 및 관행과 양립할 수 없는 관점이다. 기독교적 시민교양은 무엇이 선하고 옳은지 판단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와 가치의 문제에 대해 판단력을 사용하라고 종종 권고한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친절과 인내와 온유함을 계발하라고 권면하는데, 바로 그 단락에서 성적 부도덕과 더러움과 술 취함과 같은 "육체의 일"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라고 주장하고 있다(갈 5:16-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특정한 태도와 행위를 '판단하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많은 성경 본문이 판단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두 경우는 모두 특정한 유의 판단 자세에 대해 경고한 것이었다. 마태복음의 경우는 자기 잘못은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남을 비판하는 위선적인 인물에 대해 얘기하는 대목이고, 누가복음은 남을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는 자세로 비판하는 자들을 언급한다(마 7:1-5; 눅 6:37-38). 오늘날 흔히들 말하는 '용납' 과 '인정'은 사실 예수님의 유형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예수님이 창녀와 세리들을 '용납하셨을' 때 그분이 그들의 성적 혹은 경제적 행위를 묵과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그들의 불미스러운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신실하고 창조적인 자녀로서 살 수 있는 잠재력이 그들에게 있다고 인정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며칠 후 빈민가 출신의 한 젊은이가 재판석 앞에 등장했다. 그는 이미 과거에 여러 번 재판석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 "나는 상당히 가혹한 선고를 내릴 준비가 되어 있었죠"라고 판사가 말했다. "그 때 문득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이 내 자리에 앉아 계신다면 무엇을 보실까 하고요. 그러고 나서 ' 당신이 더 창의적이고 건설적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함께 얘기해 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판사는 그저 형식적인 '예의'를 갖추고 그 젊은이를 대하는 것이 이상의 일을 했다. 판사가 한 일은 이 젊은이의 가치와 잠재력을 성찰하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은 가치의 중심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임을 상기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예술 작품이다. 그분이 우리 각자를 정교하게 만드셨으므로 우리는 모두 '특별한 피조물'이다. 내가 하나님의 눈에 비친 상대방의 가치를 상기한다면,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경의를 품고 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는 사람들이 지닌 현재의 보기 싫은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잠재력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상대방이 지닌 잠재력, 곧 장차 더 나아질 수 있는 역량을 성찰함으로써 우리는 그 사람을 온유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다

 좁은 길목에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던 두 운전사의 경우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들은 하나님이 상대방에게 주신 잠재력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교양이란 우리가 아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대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함께 영위하는 공동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그것은 가까운 관계를 열심히 가꾸는 일뿐 아니라 시민사회(civitas)에 대한 깊은 관심, 즉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을 유념하는 것이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공적인 영역에서 진정한 사랑을 보이는 유일한 길은 자기 민족에 대한 뜨겁고 무비판적인 헌신을 배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아주 건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민족주의와 과도한 애국심은 일종의 우상 숭배다. 그리고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유의 우상 숭배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자 하신다는 점이다.

  

그것(시민교양)은 복음 전도 전략이 아니다

 대학 시절, 한번은 그레이 하운드(미국릐 버스 회사-역주)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승객 중에 중년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다니면서 여러 사람과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15분 가량 얘기를 나누었는데, 대화의 주제가 거의 억지로 종교에 관한 것으로 급선회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밝혔다. 이어져 터져 나온 "진작 그걸 얘기했어야지!"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무방비 상태에 있던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이 그리스도인 남자의 '교양'은 하나의 책략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내 가족 관계, 공부, 취미 등에 관한 그의 질문은 아주 불성실한 것이었다. 그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15분 동안 나에게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에 놀아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은 시민교양을 복음 전도를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목적으로 그들을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시민교양은 그로 말미암는 전도의 열매나 정치적 효과를 떠나서 그 자체로 귀중한 가치가 있다. 남을 존중하고 좀 더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이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복음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 있도록 시민교양을 옹호하고자 한다.

 

 

Comment_ 제2장 기독교적 시민 교양에 대한 오해를 보면서 상당히 내 마음이 찔렸다. 나도 정말 마음에 속에서 우러나와서 남을 걱정한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그냥 겉치레로 "잘 지내죠? 뭐하고 지내세요?"라고 물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졌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나 뿐 아니라 나와 마주한 사람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작품인데, 내가 그들을 타인으로써 나와는 관계없는 그런 사람으로 치부해버리고 개인적이고 독단적으로 내 일에만 너무 치우쳐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실제로 군대에서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취미를 물어보고 사는 곳을 물어봤던 내 자신을 발견하면서 내가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생각되어지는 모습들이 당사자에게는 탐탁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얘기하고 교회가지고 얘기를 끝맺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나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군대라는 아주 특수하고 선후임관계라는 특별한 관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

 한 가지 궁금하고 따지고 싶은 것이 있다. 왜 저자(역자)는 시민교양을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로가 말하면서 마치 시민교양과 구분되어지는 것처럼 좀 더 고귀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시민교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교양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 복음을 알게 되고 교회를 다니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 저자(역자)가 기독교적 시민교양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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