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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11)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UNCOMMON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AN UNCIVIL WORLD

신학

by Nomad seeking Freedom 2024. 1. 19.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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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다른 한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시민교양의 한계

 "어떻게 내 믿음과 내 민족을 저버릴 수 이단 말인가?" "내가 그 정도까지 굽힌다면 완전히 부러지고 말 거야!" "다른 한편으로는..." "아니야! 다른 한편이란 없어"

 신념있는 교양을 개발하려고 애쓰는 자는 누구나 테브예가 도달한 그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생애 중에도 시민교양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순간, 모든 대안을 숙고해 보았지만 우리 신념의 한계 상황에 봉착한 순간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다.

 

조직윤리

 단순하게 고안된 해결책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 부적절하다. 더 나은 교육, 더 효율적인 의사소통, 더 발전된 의사 결정 체계, 새로운 갈등 관리 방법들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의견 차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는 별 소용이 없다. 자기 신념이 투철한 사람들은 '다른 한편'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 역시 그런 상황에 접하게 될 때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의지를 갖추고 준비해야 한다. 시민교양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정당한 전쟁'론의 예

 정당한 전쟁론은 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할 때 생기는 실제적인 도덕적 문제에 대해 깊이 숙고한 그리스도인 윤리학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정립한 이론이다. 정당한 전쟁 이론은 군사적인 행동을 할 때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경계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우리가 다른 유의 '전쟁'에 임할 때도 이와 똑같은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참여하는 모든 '전쟁'에서 영적, 도덕적 지침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내 명분은 정당한가? 이것이 가장 먼저 제기되는 핵심 질문이다. 우리는 죄인이므로 사실 정의와 문제와 별 상관이 없는 논쟁에 휘말리기가 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뜨거운 논쟁에 깊이 관여하기 전에 자신이 과연 올바른 편에 서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낸 입장은 신빙성 있는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믿을 만한 권위에 의거한 판단에 호소하는 것은 정당한 전쟁 이론의 중요한 요소다.

 영적 전쟁의 문제에서도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고 '공식적인' 후원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공식적인 입장'에 반하는 입장을 견지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루터는 교회 전체의 권위에 대항하여 단순히 자신의 사적인 해석을 발표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성경과 기독교 전통을 대단히 주의 깊게 연구했다. 그는 신뢰할 만한 친구와 동료들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루터는 더 큰 기독교 공동체의 현명한 자문을 열심히 구했던 것이다. 주의 깊게 그리고 기도하는 자세로 공동체의 분별력을 구하지도 않고 "다른 한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내 동기는 순수한가? 우리는 아무리 좋은 명분이라도 그것이 나쁜 동기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 도덕적 투쟁에 임할 때 실제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명분이 전적으로 변호할 만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이 참으로 우리의 동기를 유발하는 것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시민교양의 선을 넘는 것이 과연 최후의 방책인가? 이 질문은 전략을 선택할 때 철저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우리는 정말 시민교양의 자원을 모조리 활용해 보았는가?

 

 시민 교양이란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이다. 그것은 우리가 감정 이입의 노력을 그만두고 싶은 유혹에 쉽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때로는 정중한 대화로 충분하지 않아 시민 교양의 선을 넘어서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시민교양의 기본적인 요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교양이 못 미치는 인물이 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한 가지 대안이 있다면 단순한 교양을 초월하는 것 뿐이다.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가? 어떤 상황에서는, 당시 과감한 도덕적 입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 안 가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쓸데없는 대응으로 판명될 수 있다.

 내가 사용하는 수단이 내가 추구하는 선한 목표에 걸맞는가? 우리는 비용-수익의 분석을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상충 관계'(Trade-off)도 중요한 문제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다른 모든 것을 감안할 때 그것들과 맞바꿀 만한 결과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책임 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미리 주의 깊게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전쟁에서도 친절을 배푼다?

 어거스틴은 이 죄 많은 세상에서는 때때로 폭력이 도덕적으로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언젠가 친구에게 쓴 글에서, 악행을 일삼는 자를 벌함으로써 외부의 적들을 정복하는 일에는 성공하겠지만, 우리 자신은 "내부의 적" 곧 "부패하고 비뚤어진 마음"에 의해 파괴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친절한 마음"을 계발해야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전쟁조차도 친절을 배제한 채 수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시민교양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건대 그 기본적인 요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친절과 온유함을 제쳐놓을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실제 상황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런 사람들을 온유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대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 가지 의미는,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이요 여전히 그들에게도 신의 자비가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톨릭 노동 운동의 창시자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자기 인생의 좌우명에서 이 점을 잘 요약했다. "모든 것이 은혜다."  은혜가 없다면 시민 교양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시민교양을 넘어 설 수밖에 없는 순간에 우리를 지탱시킬 수 있는 것은 은혜 말고 무엇이겠는가?

 

 

Comment_ 제10장에서는 9장에서 보았던 "그 믿음의 확신이 흔들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것 같다. 대화로써 끝나지 않고 결국 시민교양의 선을 넘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렇게 생각이 될 때 10장 처음과 끝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살아간다는 것을 있고 또 자만하고 내 생각을 다 맞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이 흔들린다고 낙담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을까? 내가 선한 계획을 세우고 그들에게 선하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다 선하게 받아 드릴지는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모든 것이 은혜다." 이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으면서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존 칼빈이 하는 말이 생각이 났다.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옷을 입기 위해 우리는 미덕이 전혀 없는 벌거숭이이며, 하나님에 의해 채움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아무 선한 것이 없으며, 그분에 의해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아무 선한 것이 없으며, 그분에 의해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아무 선한 것이 없으며, 그분에 의해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죄의 종들이며, 그분에 의해 비췸을 얻기 위해 눈먼 자이며, 그분에 의해 교정을 받기위해 절름발이이며, 그분에 의해 지탱되기 위해 약한 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믿음이다."

 그야 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죄로 가득한 나는 아무 것도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만 갈망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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