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지옥은 무례한 개념인가? (12)무례한 기독교 RICHARD J. MOUW, UNCOMMONDECENCY CHRISTIAN CIVILITY IN

신학

by Nomad seeking Freedom 2024. 1. 20. 02:21

본문

지옥

11. 지옥은 무례한 개념인가?

 
 친절하고 온유한 사람이 지옥을 믿을 수 있는가? 지옥은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혹평을 받고 있다. 지옥 자체가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례한 실체인 것이다. 사실 우리와 전혀 다른 신념을 가진 자들이 영원히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것보다 더 무례한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실로 매우 무례한 믿음인 것 같다.
 

 전통적 가르침

 내가 지옥의 실재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을 수용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용어를 상당히 신중하게 선택해서 한 말이다. '수용하다'라는 말은 수동적인 뉘앙스를 풍기는데, 그런 어감이 내 입장을 잘 대변해 준다. 
 
 나는 지옥에 관한 가르침을 좋아하진 않지만 지옥을 하나의 실제로 수용하는 것이다. 내가 수용하는 것은 문자적인 지옥불과 신의 보복에 관한 대중적 이미지의 옷을 모두 벗겨 버린,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가르침이다. 이 견해에 따라 내가 이해한 바는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 세계를 혼란케 하는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하나님을 그저 낭만적으로 포장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공식에 쉽게 끼워 맞출 수 없다는 점이다.
 
 영적인 동향을 관찰하는 이들은, 요즈음 지옥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예전보다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과 우리 중 많은 자들이 쓰고 있는 (사회적 불의를 보지 못하게 하는) 눈가리개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만일 있다면, 즉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실지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진노를 경시한다면, 우리는 가난과 핍박으로 찌든 인생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신학적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옥을 이해하기

 영국 성공회 신학자 피터 툰(Peter Toon)은 만인 구원설을 거부하지만, 지옥에 대해 얘기할 때는 매우 주의해야 하나고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그들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이 주제에 대해 체계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 않다면, 당연히 우리도 "그 최소한의 내용을 넘어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툰은 충고한다. 우리는 내세의 성격에 관해 논쟁하고 지옥의 '필요성'을 그럴듯하게 변호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최소한의 내용

 툰이 지옥에 관해 말하고 생각할 때 논의를 '최소한의 내용'에 국한시키자고 주장한 것은 옳다. 그 내용의 일부는 시민교양의 주제와 상관성이 있으므로 여기서 부각할 필요가 있다.
 
 지옥의 실재는 죄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지옥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의 죄성을 최소화하는 것과 나란히 등장할 때가 많다. 죄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심하게 모욕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예가 걸려 있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자기 창조 세례를 손상시킨 끔찍한 악을 어떻게 다루실지는 그저 몇 마디 표어로 표현될 수 없다.
 
 지옥은 인간의 자유의 중요성을 더욱 부곽시킨다. 인간의 자유는 내가 지옥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지옥이란 자유로이 선택한 상태라는 점이 나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를 끈질기게 거부함으로써 초래되는 궁극적이고 불가피한 결과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분리, 즉 건강한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최종적으로 자라 버린 상태다. 로마서 1장에서도 하나님은 악인들이 스스로 선택한 악한 계획을 실행하도록 내버려 둔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옥 교리는 하나님이 내가 선택하는 인생 계획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지옥은 최종 결산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의미한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데, 현재 우리가 가진 증거만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 복음의 핵심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종 결산을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우리의 의무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아록 있는 것에 비추어 행하는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시민교양과 관련된 교훈

 우리는 늘 성경이 허락하신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해 온 것 같다. 이런 잘못을 시인하고 '최소한의 내용'에 주목하여 그런 관행을 시장하는 것은 자유주의도 아니고 타협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다운 정직성을 기르기 위한 의미 있는 훈련이다. 인간의 사악함은 엄연한 실재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선택한 인생 계획에 비추어 우리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하실 것이다. 이 세 가지 주제는 내가 시민 교양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중요한 명령

 지옥은 무례한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옥은 하나님의 명예와 우리의 자유에 관한 문제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예와 인간의 자유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데는 그보다 더 바람직한 방법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 벌카우어(G.C.Berkouwer)가 지옥에 관한 글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하고 물었을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3-24). 어쩌면 슬쩍 둘러대는 대답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합당한 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는 굉장한 것이 걸려 있는 명령이다. 영원한 중요성을 지닌 말씀이다. 바로 이 명령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온유하고 공손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Comment_ 제11장에서는 앞에 10장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은혜와는 반대되는 성격의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과연 지옥이 하나님과 어울리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끼워 맞추기에는 너무 버거운 주제이지 않은가?라는 질문들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천국과 지옥을 비교해서 천국을 강조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지옥만을 강조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들에서 정리하고 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방법이라 재미있게 느껴졌다. 결국에 그렇게 지옥만 강조해도 하나님의 주권이 꺾이지 않고 오히려 강조된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 같다.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우리는 자유를 주신 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고(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또한 공손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